용성문중 선맥

용성문중 선맥의 해설

선종은 달마대사가 중국에 오면서 그 초조로 하여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 스님에 의하여 그 많은 도인이 배출대고 남악회양(南岳懷讓 677~ 744) 스님 밑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에 의하여 조사선(祖師禪) 이라는 중국적인 선이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혜능은 중국의 남쪽에 주석하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북종의 신수와 상대적으로 남종선(南宗禪)이라 일컬어지게 된다. 또한 그 제자들에 의하여 더욱 확고하게 선종의 전통은 남종선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당시 신라는 많은 정치적인 유학생 파견과 함께 불교에서도 선진 불교학을 배우고자 당에 입문하게 되면서, 같이 선법의 유학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당시 마조스님의 제자들에게서 선법을 익히고 배워온 스님들이 전법의 인가를 받고 신라에 귀국하여 선법을 펴게 되지만 당시의 신라는 참선에 대한 전통이 없는 때라 참선을 통한 도의 개념이 없어서, 유학 전법도승은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그 제자들에 의하여 점차 각기 한 방면의 문파를 형성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러 5교9산으로 형성되고 선이 급속하게 보급되게 되면서, 선사들은 고려 창건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 또한 정신적 도덕적인 스승이 되었다.

이들 선사들은 고려 창건의 주축이 되는 신라의 지방 호족들과 연계가 되면서 그들의 스승이 되고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각기 지방에 선의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고려가 통일하고 불교는 국교화 되고 9산의 문파는 점차로 다시 교종의 세력에 밀리면서 그 맥이 이어오다가 고려 중기에 사굴산문(獅堀山門)의 맥인 보조 지눌의 등장으로 많은 조계의 선종을 계승하고자 하는 선풍이 앙양되어 그 문하로 많은 선지식이 나오고, 또한 나라의 국사를 계속 배출하게 된다. 이에 선이 부흥이 되어 고려후기가지 조계의 남종선이 새롭게 고려의 기틀로 되고 또한 불교도의 중심이 된다.

중국에서는 임제스님(臨濟義玄? ~866)의 등장으로 그 문하로 또한 많은 도인이 배출되고 활약함으로서 임제의 선맥이 선종의 주류가 되면서 남종선의 정맥으로 이어져 고려후기는 ‘임제종(臨濟宗)이라 하였으며, 또한 임제의 문손들이 당시에 중국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 임제종은 그 맥을 이어오다 황룡혜남(黃龍慧南1002~1069) 스님을 중심으로 한 황룡파와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 스님을 중심으로 한 양기파로 나뉘는데, 양기파 문손인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새롭게 세워 선종의 가풍을 드날리게 된다. 그의 문손이 많이 배출되면서 활약하고 대혜선사의어록은 고려에 유입되면서 고려중기 선을 부흥시킨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 스님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간화선이 임제종이라는 전통이 고려에도 세워져 가고 또한 거기에 많은 간화선을 통한 많은 도인이 출현하여 고려후기는 중국적인 임제선을 배우고자 유학하는 스님이 많아졌다.

중국에서는 『선요(禪要)』를 지은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와 같은 법 스승인 급암종신(及庵宗信 미상)스님 그리고 그 법손이 선지를 드날리고 있었다. 고려에서 조계종의 종통으로 삼고 있는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 스님은 고려에서 정진을 통하여 그 심요를 얻고 정진을 하다가, 원나라 당시 급암종신 밑에 석옥청공(石屋淸珙1271~1352) 선상에게로 가서 자신이 지은 『태고가(太古歌)』를 보여주고 인가를 받았으며, 2년간 모시면서 그 법을 이었다. 귀국하여 공민왕 때에 왕사와 국사가 되어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통합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큰 선지를 드날린 스님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 또한 고려에서 인도 스님인 지공화상(金陵寶誌 418~514) 과 인연을 맺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서 석옥청공 스님과 함께 임제의 제 18대 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1279~1352)선사에게 찾아가니 처림은 그에게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를 물었다. “지공을 만났다”고 말하니, 다시 “지공이 무엇을 하던가?” 하고 물었다. 그가 “천검(天劍)을 쓰더라”, 고 답하니, 처림은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받아오너라” 했다. 이에 그가 좌구로 후려치니 처림은 선상(禪床)에 쓰러져 “이 도둑놈이 날 죽인다”고 외쳤다. 그가 처림을 일으키면서 “나의 칼은 죽이고 살림에 능합니다.”하니 처림이 크게웃고 법을 인가해 주었다. 그 후 다시 지공을 모시고 정진하다 고려로 귀국하여 보우스님의 뒤를 이어 왕사가 되고 선교를 관장하였다. 나옹의 법은 환암혼수(幻庵混脩 1320~1392)로 이어지고 다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 ~1405)에 이어지고 그는 조선에서 왕사가 되어 그의 문도는 조선 초기에 불교계를 주도하게 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태고보우를 종조로 삼으면서 그의 문손이 환암혼수로서 법을 잇고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으로 이어져 또한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문손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환암혼수는 기록에 의하면 나옹의 법을 잇고 있으며, 태고의 문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환암혼수의 비문은 태고에 대한 언급은 없고 나옹에 대한 내용만 보이는 점에서 상이한 점이 있지만, 나옹스님은 태고보우 스님보다 먼저 입적하여 비문이 더 늦게 세워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태고스님의 기록에 그 문손이라고 함에 따라서 양쪽의 스님에게 배워 익힌 사실로 여기고, 조선의 법맥을 세운 청허 휴정의 문손은 태고보우 스님을 세우게 된다.

다른 한 가지는 태고 보우스님은 석옥청공의 법을 받고 거기에 주석하면서 배우고 있지만, 나옹스님은 먼저 지공스님을 만났고, 또한 평산처림에게서 법을 인가 받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지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다가 귀국했다는 점에서, 나옹을 임제의 정통으로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본다. 또한 중요한 점은 비록 나옹의 문도가 무학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불교의 흐름을 주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계승은 단절되어 졌으므로 결국 누구의 문도가 계승자로서 단절되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환암혼수는 어느 문도인가가 관건이 되었으며, 이에 정황을 따라서 나옹스님보다는 태고스님을 환암혼수와 연계하여 그 법맥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서 고려 중기의 중흥조인 보조국사를 그 연원으로 하지 않은 것은 정통 임제 정맥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즉 태고보우는 중국의 임제 정맥인 선사를 통해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종조로서 그 확고한 입지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선종의 법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급암종신 → 평산처림 → 나옹혜근 → 무학자초 → 함허득통.
급암종신 → 석옥청공 → 환암혼수 → 구곡각운 → 벽계정심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청허휴정.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제 → 환성지안 ......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을 정점으로 해서 또한 많은 문도가 배출되고 그 흐름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스님이 되는 자격증인 도첩제 마저 폐지됨으로써 천민의 신분도 아닌 불법적인 신분으로ㄴ 천시를 받아왔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나라와 지방에 필요한 진상품을 올려야만 했으며, 양반과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 신분은 또한 언제라도 부역과 군대 복역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갖은 고초 중세서도 조선전기 명종 때 문정황후의 등장으로 허응당 보우 (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이 천거되고 다시 불교가 양종이 복구되어 임진란에 중추적 역할을 한 청허휴정과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청허휴정 아래로 많은 선사가 배출되어 또한 각기 많은 문손을 배출하게 된다. 당시에 편양언기 스님과 더불어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스님과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그리고 송암유정과 함께 서산 사대파(四大派)를 형성하게 되며, 각기 문파는 많은 문도를 배출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불교의 중흥조 청허휴정과 그 문도는 불교교단을 이끌어 조선후기 선맥의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편양의 문손에 의하여 많은 선덕과 학장이 배출되면서, 선에서 뿐만 아니라 교학까지도 중흥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허응당 보우 스님을 등용했던 문정왕후가 섭정을 마치고 명종 왕의 실권이 회복되면서 실각하고 불교는 다시 산간의 교단으로 축소될 수밖에는 없었다. 승과의 부활에 따른 양종체제는 국가의 정식적인 승인 없이는 오래갈 수 없으므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불교의 힘은 발휘가 되지 못한 가운데 서산 문도의 선문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말기에 다시 선을 부흥시킨 스님은 경허성우(鏡虛星牛1849~1912)스님으로 당시 상황은 개항기 이고 또한 일제의 점령기이기도 하며, 일본에 의한 계급철폐와 스님의 도성출입금지 철폐로 조금은 자유스러운 때였지만 경제적, 사회적인 압박과 현실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경허스님은 도를 통하고 다시 결사와 더불어서 선을 진작시키고자 했고, 그의 문하에서 또한 도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곳곳에서 그 법석을 펴고, 선원이 여러 곳에서 개설되어 참선의 전통이 크게 활성화 되었다. 경허스님은 만화보선(萬化普善) 스님에게서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 강백을 했지만 도는 자신의 인연사에 따라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의 법맥을 용암혜언(龍巖慧彦1783~1841) 스님을 잇는다고 하였다, 이는 청허의 12세손이 되고 환성지안의 7세손이 된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호암체정→ 청봉거안→ 율봉청고→ 금허법첨→ 용암혜언→ 경허성우

지금의 경허 문손인 수덕사에서는 용암스님 밑으로 ‘영월봉률-만화보선-경허성우’로 이어지는 법맥을 상정하여 청허하에 13세 환성문하 9세로 되어 있으며, 그 문하로는 만공월면, 수월음관, 혜월혜명, 한암중원, 침운현주 등 스님들이 그 맥을 잇고 있다, 경허스님의 법을 선을 진작시킨 경허스님 역시 선과 교를 같이 겸한 대종장이었고, 위로 선교를 겸한 선사의 전통을 이었던 것이다.

일제점령기에 선을 진작시키고, 대중포교의 문을 열어 재가자에게 최초로 참선을 가르쳐 서울에 선을 대중화한 스님으로 용성진종 대종사께서 계시는데,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당시의 불교계는 일제의 종파가 유입되어, 권력과 연계되어 모두가 대처식육 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본사와 말사의 주지가 거의 모두가 대처승인 상황에서, 철저하게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계율정신과 대각운동 그리고 선농일치의 정신을 실천했으며, 외국에서 들어온 종파들 보다 불교가 우위에 있음을 알리는 글을 쓰고, 또한 대중포교의 일선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시민선원을 개설하였고, 불자님들에 참선을 보급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후반기의 생애는 불교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헌신했다.

스님은 여러 번의 깨침과 함께 많은 선지식을 참방하여 선지를 인정받고 또한 중국에도 여러 선지식과 선문답을 통하여 조선의 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제의 혼란시기에 그는 결사를 이끌어 정진하고 선당을 개설하여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용성진종(龍城震鐘1864~1940) 스님은 처음에 신묘장구 주력을 통하여 힘을 얻고나서 다시 ‘無’자 화두를 통해서 심요를 얻어 확실히 깨우치게 된다. 현재 스님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용성진종

용성스님은 교류하고 있던 선지식들과 그리고 여여한 거사님들과 많은 의견을 교류하여 환성지안은 육조혜능으로부터 35세손이며, 자신을 환성아래의 원사하여 임제의 31대손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은 대혜종고를 원사하여 스승으로 삼았고, 조선시대 벽계정심(碧溪正心 미상)의 경우도 고려 말의 구곡각운(龜谷覺雲미상)에게 원사하여 그 선 맥을 이어왔다.

용성진종 대선사의 문하로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스님과 동산스님 아래 현대의 고승인 퇴옹성철(退翁性徹1912~1993) 스님이 있다. 또한 세 번의 종정으로 살아있는 보살로서 추앙을 받으신 고암상언(古庵祥彦 1899~1988) 스님이 용성진종대선사를 친견하고는 “반야(般若)의 공리(空理)는 정안(正眼)으로 봄이라”는 말씀에 언하에 크게 깨치니, 용성스님이 묻기를 “조주무자(趙州無字) 십종병(十種病)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고 용성스님이 묻자 그는 즉각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라고 대답했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의 굴에는 다름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육조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일어나 삼배(三拜)한 후에 고암스님이 답하였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天高地厚) ” 그러고는 승인 용성진종 선사께 고암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가풍(家風)은 무엇입니까?” 용성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내리치며 스님에게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이 물음에 고암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이를 본 용성진종 대선사께서는 “만고(萬古)의 풍월(風月)을 아는 자 누구인가 고암(古庵)을 독대(獨對)하니 풍월이 만고로다”라고 칭찬하시고,‘고암(古庵)’이라는 당호와 함께
佛祖元不會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掉頭吾不知 머리를 흔들며 나도 또한 알지 못하니
雲門胡餠團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鎭州羅葡長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네.
라고 전법게(傳法偈)를 내려 인가(印可)를 받고 법제자가 되었다.

청허휴정 →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제 → 환성지안 → 용성진종 → 동산혜일 → 퇴옹성철
청허휴정 → 평양언기 → 풍담의심 →월담설제 → 용성진종 → 고암상언 → 학산대원

고암진종 대선사의 입실제자로는 당호는 ‘학산(鶴山)’이며 법호가 한암대원(閑庵大元1942~ )이다.1973년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해인총림방장으로 머물 때에 저녁 정진을 마치고 방장실을 찾아 공부에 대하여 몇 말씀 여쭈니 “지금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가, 몇 년이나 참구하였는가.” 라는 물음에 “8년 간 참구하였습니다.”하니 고암진종 대선사님께서 애석하다 하고 일러 말씀하시기를 “잣나무 꼭대기 위에서 (柏樹上頭) 손을 놓고 한 걸음 나아갔을 때(手放進一步)에 당하여서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겠는고?” 하는 말씀에 홀연히 크게 깨우쳤다. 이 때 박장대소하니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슨 기특한 일이 있기에 그렇게 웃는가! 소히 일러라.” 하니 대원이 답하길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아니다, 다시 말해보라.” 하니 삼배 올리고 기립 차수하여 말하기를 “설사 천언만구(千言萬口)를 다 이른다 해도 이 속에서 있어서 상신실명(喪身失命)을 면치 못합니다.”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앉았다, 다시 고암진종스님이 마조원상 공안(公案)을 물으셨다.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더니 “여기에 들어가도 30봉이요 나가도 30봉이니 일러라.” 하니 스님이 깔고 앉았던 좌복을 머리에 이고 서서 “이것이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아니야”하시면서 스님께서 주장자로 대원스님을 치려고 하시는 찰나에 좌복을 고암진종 대선사 머리 위에 던지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에 다시 들어와서 앉으니 고암스님께서 “눈 푸른 납자는 속이기 어렵도다!” 하시고 또 1700공안을 두루 묻기에 즉시 대답하였다. 이에 오도송(悟道頌) 일구(一句)를 가져오라 하시므로 즉시에 오도송을 지어 바쳤다.

忽聞柏頭手放語 홀연히 잣나무 꼭대기에서 손을 놓고 한걸음 나아가라는 말을 듣고
廓然鎖覺疑團處 확연히 의심 덩어리 녹아 무너졌네
明月獨路淸風新 밝은 달은 홀로 드러나고 맑은 바람은 새로운데
凜凜闊步毘盧頂 늠름히 비로자나 이마 위를 활보함이로다.

고암진종 대선사께서 인가를 하시고 전법게를 내리시니

佛祖傳心法 불조(佛祖)가 전한 심법(心法)은
不識又不會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지도 못함이라.
趙州茶一味 조주의 차 맛이 일미이거니
南泉月正明 남전의 달이 정히 밝도다.

청허휴정→ 편양언기→ 풍담의심→ 월담설제→ 환성지안→ 용성진종→ 고암상언→ 학산대원

용성진종 대선사의 대각운동의 원찰인 대각사에서 열반하시기 전에 전법의식을 거침으로써 용성진종대선사 유지에 따라서 '환성지안(喚醒志安) - 용성(龍城) - 고암(古庵) - 학산(鶴山)'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되어 고암진종대선사께서는 임제스님의 32세손이 되며, 환성지안으로부터 2세손이고, 한암대원 스님은 임제스님으로부터 33세손이고 환성지안 스님으로부터 3세손이 되는 것이다.
학산대원 큰스님은 현재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에 주석하시면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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