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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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 대원 조실스님 어록 1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4-03-29 조회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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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 대원 큰스님 경책 어구

(계룡산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 공부해서 안목이 열린 이는 본인이 알아서 복을 짓고 좋은 일을 한다. 마음을 잘 쓰고 행을 잘 하려고 공부를하는 건데 밖으로 행이 없으면 실효성이 없는 공부이다.

 

◎ 부처님도 과거에 복과 덕을 심어놨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받드는 것이다. 내가 머리 숙이고 받드는 게 없는데 누가 나를 받들어 주겠는가? 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복과 덕이 높아지려면 내가 베풀고 해놓은 게 있어야 한다.   남이 하기 싫어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데서 복과 덕이 높아 진다.

 

◎ 복과 지혜를 함께 구족해야 한다.

   지혜가 없고 복만 있으면 : 부처님 당시 온 몸에 보석 감은 코끼리처럼 어리석은 채 복을 누리다가 복이 다하면 나쁘고 불행한 일을 만나고 악도에 윤회한다.

   지혜가 있고 복이 없으면 : 천하를 알더라도, 따르고 믿어주는 사람이 없게 된다.

 

◎ 대중의 화합을 깨고 분위기를 소란하게 하면 참으로 무한한 죄가 되어서 박덕해지고 복을 감하고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몇 천배의 업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 어떤 것도 못 붙이고 양극단, 양변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일구라서 이뭣고에서 중생의 아상이 다 녹게 된다.

 이런 저런 생각, 자존심 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리 해도 공부가 안 된다.

 

◎ 선지식, 도반, 도량을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발원을 하라고 했다. 대중이 모여서 수행하라는 부처님 뜻에 따라서 사는 절은 많지 않다. 학림사 같은 회상에 와서 봉사하고 수행해야 의미 있고 인생을 고칠 수 있다.

 

◎ 생각이 병(病)이다. 불조의 말씀은 별다른 말이 아니라 중생 본인의 당연한 소식이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에 가로 막혀 안 통한다.

 

◎ 통하려면 무단히 정진해야 한다. 본래 고향에 계합해 뒤집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이것 저것 듣고 사량분별로 아는 소리는 아무 소용없고 업만 짓는 거다. 다 버리고 아무것도 몰라야 된다. 순수해야 한다.

 

◎ 생각으로는 알지만 생활에서는 중생심 그대로 쓰는 게 아니고, 중생심이 안 나오는 차원으로 뒤집어져야 한다.

 

 

 ◎ 사람들은 복잡한 생활의 일과 걱정거리에 찌들어서 본래 소식에 대해 들으려 않고 도망간다. 자기가 자신을 싫어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도 욕심을 내서 편리를 찾고 뭘 구하려 하니 뭐가 되겠나? 참 불쌍한 중생이다.

 

◎ 생각 일으킨 것과 행동 옮긴 것을 보면 평가가 나온다.

 생각을 일으켜서 행동 옮긴 것이 모든 사람한테 공감이 가고, 이익과 편안함을 주고, 시비가 없는 것인가

 

◎ 내 자신의 수행이 잘 되어서 역량이 생기면, 바깥으로 사람을 접할 때 부작용이 적고 안 생긴다. 자꾸 부딪히고 부작용이 생길 때는 상대방 탓이 아니라, 자기한테 허물이 있어서 유유상종으로 그 놈(부작용)을 끌어 당겨서 생기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나를 돌이켜 보고 ‘제 잘못입니다’ 하면 시비가 끝나고 자신의 덕과 복이 높아진다. 그러지 않고 서로 따지면 태산 같은 업이 쌓인다.

 

◎ 육경(六境:색성향미촉법)에 안 따라가고 안 속는 사람은 무리 속에서 뛰어난 사람이다.

 중생 의식은 여우 같은 야호정령(野狐精靈)이라서, 육경(六境)을 대하는 동시에 담아 놓고 따라가는데, 그게 영원하지 않고 자신을 배신한다.

 

◎ 최상의 법문을 듣는 씨앗을 심는 것이 중요하다. 법문 듣는 언하에 깨달을 수도 있고, 심경변화가 될 수 있고, 공부 점검의 기회가 된다. 여러 이익이 있다.

 

◎ 정진 하면 자신만 이로운 게 아니고, 해가 만상을 비추듯 정진하는 일념의 광명이 법계에 충만하게 미쳐서 이로움을 준다. 가뭄, 홍수로 피해를 입고 하는 그런 것도 먼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중생들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이 어떻게, 어느 곳에 머물러 행하느냐에 따라 밖으로 모든 변화가 나타난다.

 마음의 때 묻은 의식이 얼마나 제거 되느냐에 따라서 자기 인생도 달라지고 밖으로 살아가는 모양도 달라진다.

 

◎ ‘본래 부처’라고 하지만 본래 부처라는 생각을 가지면 병이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 아닌 것’이 따른다. 상대적 원리로 따라 붙기에 뭐 하나를 주장하면 벌써 허물이 된다.

 

◎ 목전의 일은 찰나에 지나가면 그만인데, 지나간 것에 머물다 보니 목전의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앞뒤 생각이 딱 끊어져서 순수한 한 생각이 있으면 목전의 어떤 일도 오래 생각할 필요 없이 즉시 해결하고, 대안과 방편이 나온다.

 

◎ 일이 뭐가 안 되는 걸 보고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아직 아니구나!”

  

◎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 조작된 생각을 입력해 담아 놓고 ‘이건 옳고 저건 틀렸다’ 하면, 살아가는데 모든 것에서 부딪혀야 되고 서로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야 한다.

 

◎ 나를 개혁해야만 소망하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진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중생으로 남아 있어서 영원한 편안함과 즐거움이 없다. 서로 싸움하고 모함하다 끝난다.

 

◎ 중생의 의식은 8식이 왕이고 그 지시대로 살아간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은 그 중생의 의식의 왕을 쳐 부수어 진면목의 왕을 되찾았다는 말이다. 중생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의학이나 과학이나 학문으로 안 된다.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화두’ 이다.  화두는 깨달음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의심할 게 없이 다 된다.

 관법은 마음이 임시 안정되는 거고 영원한 안정은 아니다.

 

◎ 법을 깨달으면 법이 현실화(現實化)가 된다.

   사업이나 사람을 멋지게 활용한다.

 

◎ 불교는 무아와 자비사상이다. ‘무아’는 진리를 말한다. 중생이 가지고 있는 나(我)가 없는, 상대 양변이 무너진 무한대한 진리의 차원이 무아(無我)이다. 무아의 지혜는 걸림 없이 우주 천하를 무애 자재하게 활용한다. 무아를 아는 이는 만물을 둘 아닌 하나로 본다.

 무아의 진리로 일체 중생을 대자비로 사랑하는 게 불교이다.(기독교 ‘박애’는 ‘인류’에 국한)

 

◎ 무아의 마음의 진리는 어떤 난제가 닥쳐도 바로 보고 바로 알기 때문에 대응책이 바로 나온다. 이걸 지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며칠이 가도 결정이 안 나오는 문제가 있을 때, 지혜로서 바로 거기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면 그만큼 걱정 근심과 시간 낭비가 없고 생산적이 된다. 제시하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공감을 하고 시비가 붙지 않는 완벽한 거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바로 보고 판단하는 지혜의 능력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하고 보면 실수한 것이 많다.

 

◎ 어둠 속으로 가면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부처님의 진리 속으로 가면 대광명의 빛 속을 가는 거라서 중생이 가진 재앙이 없어지고 면하게 된다.

 부처님의 진리의 힘, 가피를 받아서 생활에서 일체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복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 불교는 가피 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부처와 같은 영원한 복과 덕과 지혜를 갖고 있으니 스스로 찾아서 만족되게 살아가라고 하는 종교 중의 종교이다.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 부처로 살아 가라는 거다.

 나를 들여다 봐야 나를 확인하고 고칠 수 있다.  이게 자기한테 현실적으로 급한 일인데, 사람들이 이걸 놔 놓고 딴 짓을 한다.

 이걸 우선적으로 해서, 아침, 저녁으로 나를 돌이켜 보는 참선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학교 다니고 모든 자기 하는 일을 병행해서 열심히 해야 한다.

 

◎ 지식과 학식을 가지면 아는데 가로막혀 진면목을 깨닫기 더 어렵다. 그걸 다 비워버려야 하는데 비우는 과정이 오래 걸린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한 분들은 단박에 깨달았다.  

 화두를 할 때는 지식, 상식이 박살 나는 거다.  

 홍인스님이 혜능 앞에서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뒷짐 지고 나간 의지는 선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선은 마음이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다.

 

◎ 평소에 놀 때는 번뇌망상이 있는 줄 모르는데 고요히 앉아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하면 번뇌망상이 일어난다. 그때 본인이 벌써 거기서 한가지 확인을 한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 복잡한 번뇌망상이 많이 있구나” 그걸 확인 했을 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뜻대로 잘 안되고, 하는 일마다 서로 시비가 생기고,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기고, 마음으로 번민, 고민을 하는 등 모든 일체 좋지 못한 요소가 나의 이 망상 때문에 있었구나!” 하고 알아야 된다.

 망상이 원흉인데, 망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놈이 뭐냐? 본래 망상인가? 본래 망상이면 24시간 계속 망상이 있어야 하는데 망상이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 본래 망상이라면 안 맞다.

망상이라고 보고 망상인 줄 아는 그 놈은 뭘까? 그걸 알면 모든 망상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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