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

오등선원

오등선원의 역사적 고찰 사진입니다.

학림사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예전에는
제석사(帝釋寺)라는 고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당시 소실된 것으로 학봉리
마을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학림사는 1986년 8월 조계종
전 종정이셨던 고암(古庵) 대종사님을 증명으로, 법제자이신 학산 대원스님에
의하여 재창건(再創建)하였다.

지금 학림사가 있는 골짜기의 옛 명칭이 제석골인데 ‘제석(帝釋)이라 함은
불교의 제석천왕을 말하는데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육도의
세계가 있는데 천상, 인간, 아수라,지옥, 아귀, 축생계 이다 수미산(須彌山)과
천상세계의 33천이 있는데 그 중의 도리천(忉利天)에 제석천왕이 거하며
우주를 관장하는데 불교를 위해 호법하는 성중의 왕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산에서 성도한 후에 바로 열반에 들려 했으나 바로 이 제석천왕이 열반에 들지 마시고 인연 있는 중생을 자비로써 교화 인도해 줄 것을 간청하여 부처님께서 비로써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기 시작하여 49년간 중생교화를 마치시고 열반하셨으니 오늘날 우리에게 불교가 전래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제석천왕의 은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여기 골짜기의 옛 명칭이 제석골 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서 불교적 색체를 엿 볼 수 있으며 지금의 학림사터에 ‘제석사(帝釋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래된다.
그 전래 내용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백제왕이었던 의자왕이 제석봉, 즉 지금의 임금봉에서 국태민안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내려와 이 자리에 사찰을 창건하고 그 사찰 명칭을 제석천왕이 백제를 호국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의자왕이 제석봉의 이름을 따서 제석사라 이름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는 제석봉을 임금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위와 같은 설도 또 신라의 자장율사께서 이곳 계룡산에서 수도하실 때 마침 이곳을 지나다 참으로 영묘한 터라는 생각에 잠겨 이곳에 사찰을 창건한다면 앞으로 능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다는 영감에 사찰을 창건하고 제석봉이 바로 이곳 위에 위치하여 제석봉의 이름을 따서 제석사라 이름하고 얼 동안 주석 하셨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구전이고 지금 명확히 창시기를 엿볼 수 있는 사서나 체계적인 문헌기록의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다만 학봉리 마을의 노인들에 의하면 조선시대까지는 절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혹은 그 밖의 사유로 절이 소실되었다고 전해질 뿐 이다. 그러나 86년에도 학산대원스님께서 사찰을 재창건 할 때 평토 작업을 하는 와중에 많은 기와 등이 발견되기도 한 점을 미루어 예전의 제석사 터라고 생각하고 불사의 서원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계룡산 학림사 뒤편의 주봉(主峯)은 계룡산(鷄龍山) 천왕봉의 정맥이 석릉(石稜)을 타고 내려와 힘차게 좌우굴곡(左右屈曲)하고 상하기복(上下起伏)하면서 내려와 현재 지금의 헬기장이 있는 곳에서 한 번 크게 솟아서 힘을 맺은 다음에 다시 그 맥(脈)을 타고 학림사로 뻗어 내려오고 있다. 또한 그 주봉에서 좌청룡(左靑龍)로는 장군봉과 임금봉,수리봉이 힘차게 솟아 있고 우백호(右白虎)로는 그 맥이 내려오면서 세 갈래가 되어 학림사를 옹호하고 있어 많은 인정(人情)을 모으게 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남주작(南朱雀)은 학이 머리를 길게 빼어 이곳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는 형상을 가고 있으며, 물이 나가는 외수구(外水口)는 금강으로 이어져 학림사 도량을 크게 감싸고 돌아나가고 있다. 그 수구(水口)의 사(沙)는 전형적으로 거북의 모양을 띄고 있어서 여기 도량이 자연이 정해진 천혜(天惠)의 수행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도량은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장군안검(將軍按劍)’ 이면서 선인(仙人)이 학을 타고 있는 ‘선인기학(仙人騎鶴)’ 형국을 이루고 있다. 동남간으로 연화봉(蓮華峰)이 솟았으며 남쪽으로 문필봉(文筆峰)이 솟아 있다.

여기에 좌청룡 쪽으로 그 계곡은 사철 물이 끊이지 않고, 수질 정밀검사에서 보면 1급수에 해당되며, 이곳은 내청룡(內靑龍)이 도량 전체를 감아 돌고 나가는 전형적인 명당(明堂)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을 재 창건하신 학산대원 선사는 오랜 세월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해오다가 86년 우연히 어느 노옹이 이곳에 예전에 절이 있었는데 참으로 좋은 곳이라는 말을 듣고, 직접 탐방하여 스님들이 수행정진 하기에 적격임을 판단하고 다시 절을 창건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수행으로만 일관하였기 때문에 스님께서는 재정적으로나 그 밖으로 여러 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계룡산 갑사로 가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생각하시고 갑사에 도착하셨는데 그날 저녁에 좌선 정진하는 도중 비몽사몽간에 예사롭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주장자를 짚고 나타나 따라오라고 하시어 기이하게 생각하고 노스님을 따라 나섰는데 한참을 따라와서 노스님이 멈추어서 와보니 바로 그날 왔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간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었다.

노스님께서 주장자를 짚고 사방을 돌아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도량을 세워 수행정진 하면 많은 도승(道僧)이 배출된다고 하시면서 학산대원 스님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시길 “스님이 뜻이 있으시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셨다. 그래서 학산대원 스님이 그 노스님께 묻기를 “스님께서는 누구시옵니까.” 하니 노스님께서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는가.” 하시면서 “나는 지장이라 하네.” 하시고는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지셨다.

스님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같은 것이었으나 생시와 다름이 없이 생생하고 불보살의 현시(現示)로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여 다시 이곳 옛 제석사 터(지금의 학림사)로 돌아와 보시고서 사찰재창건의 마음을 굳히고 수행 당시 제방선원에 대중공양을 위해 왔던 인연 있는 불자들을 만나서 그간의 전후 사정을 말하고 창건의 의지를 보이니 흔쾌히 받아들여져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윤고암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다시 이곳을 탐방하셨는데, 이곳을 보신 고암스님께서 탄복하며 이 터는 선수행의 도량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극찬을 하시면서 이 계룡산 일대에 선수행(禪修行) 도량이 없으니 이곳에 사찰과 선원(禪院)을 다시 창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한, 지금은 열반하신 불국사와 법주사의 조실(祖室)을 역임 하셨던 월산 선사(禪師)께서도 당시에 이곳을 탐방하시고는 사찰을 재창건할 것과 아울러 선원을 개원(開院)할 것을 부촉 하시었다.

그래서 1차적으로 학산대원 스님께서는 작은 토굴을 창건하고 은법사이신 고암상언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부처님 점안식을 봉행하고 주석하셨다.

먼저, 대원스님이 작은 토굴을 창건하고 고암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 점안식을 봉행하고 주석하셨다. 그 다음에 정식으로 1986년도에 사찰을 재창건하고 옛 제석사의 명칭을 개칭하여 ‘학림사(鶴林寺)’라고 이름하고 점차 가람을 정비하여, 1995년에 학림사 내 선원을 건립하여 선원 이름을 ‘오등선원(五燈禪院)’이라 하여 사부대중 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학림사 오등선원의 개원식을 거행하고 학산대원 선사를 조실로 추대하였다. 또한 최근에 일반 시민들의 정신문화를 선도할 시민선원도 건립하여 일반 불자들도 정진 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오등선원은 인근 대전, 충남은 물론 전국의 사부대중이 모여서 학산대원 조실 큰스님의 가르침과 경책 아래 결제와 산철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하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