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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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3>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7-14 조회수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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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조사 이분이 반야경 주해를 낸 것을 첫머리부터 새겨서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바라자(波羅者)는 도피안야(到彼岸也)"

바라(波羅)라고 하는 것은 피안에 이르는 것(到彼岸)이다.

경에는 이르되 "도하수용벌((渡河須用筏)이라" 물을 건너가려면 모름지기 뗏목을 쓰고, 도안불수선(到岸不須船) 언덕에 이르러서는 배를 수거하지 아니한다.

약일인(若一人) 발진귀원(發眞歸源) 하면,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참됨을

발휘해서 근원에 돌아가면, 궁리진성(窮理盡性)이요, 이치가 다 하고 성품이 다 해서 친견본래면목(親見本來面目)이라, 친히 본래 면목을 보는 것이라.

 

돈오무생(頓悟無生)이라, 몰록 남이 없는 거를 깨달아야,

변등피안(便登彼岸)이라, 이것을 피안에 오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거를 피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이죠.

 

일득영득(一得永得)하고,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지고,

일오영오(一悟永悟),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은 것이 된다.

경불복생(更不復生)이고, 절대 다시 나지 않고,

윤회영식(輪廻永息)이라, 윤회를 길이 쉼이니,

생사영단(生死永斷)이라, 나고 죽는 생사도 길이 끊어진 자리로다~

이 말이에요.

작일개물외한인(作一個物外閑人)이라. 이는 한개의 사물 밖의 한가로운

사람이더라. 일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다 해마침..

 

임성소요(任性逍遙) 적용쾌락(寂勇快樂)이라,

그 성품에 맞게 멀고 가까운 곳을 마음대로 오고가고,

아주 고요하고 쾌활해서 즐거움 뿐이다.

이것이 피안(彼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바라밀(波羅密)할 때, ()자는 유어태허능포만법(喩於太虛能包萬法)이라,

태허가 능히 만법을 다 안고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

태허(太虛)가 일체 모든 만법을 한개도 빠뜨리지 않고, 새는 것이 없이

그대로 다 포근히 안고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 말이에요. ()자는..

 

태허(太虛) 가운데에는 삼라만상(森羅萬象), 정여무정(情與無情),

총재태허지내(總在太虛之內). 저 태허의 안에 다 있음이니,

만법시심지이명(萬法是心之異名)이라,

만법은 이 마음의 다른 이름이라 이 말이에요.

 

이건 무슨 소리냐?

이것이 '죽비다' 이랬단 말이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의 모든 것이 다 마음이다~ 이랬단 말이지.

그렇다면 누구든지 우리가 물으면 이것도 마음입니다.

그럼 너 어디 가나.. 마음 먹으러 간다.. 밥 먹으러 가야 된다는 소리인데..

목탁을 쳤는데 어디 가냐~? 마음 먹으러 갑니다.

전부가 마음 먹으러 가는데.. 이게 통용이 안 돼. 이러면은..

일체가 모두 이 만법이요, 만법이 마음이라~ 마음은 분명히 마음인데,

다만 마음에서 이명이라, 다를 이(), 다른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 소리야.

'마음'이라는 거는 하난데, 하나의 마음에서 다른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자꾸 여러 개로..

 

분위팔만사천(分爲八萬四千), 나누면 팔만사천이 되고, 넓힌 즉 무궁무진(無窮無盡)이라,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어,

심생종종법생(心生種種法生), 마음이 한 생각 낼 때에, 여러 수천가지가 다 벌어지는 거예요. 천태만상(千態萬象)..

하늘, , 일월, , 산에 있는 수림, , 광산, 사람, 일체 무수한 역사,

과학, 현대 물리학이니 하는 것과, 모든 일체 중생이 살아가는데 생활하는 도구 등, 여러 수천만 개의 이름이 무궁무진하게 벌어지는 걸 말하는 거예요.

마음이 날 때는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할 때는 갖가지 법이 일시에 없어짐(心滅種種法滅)이니,

저일개자(這一個字)가 인인진유(人人盡有)), 저 한 개의 글자(“”)를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으니,

불능자견(不能自見)이라, 능히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라.

설역불신(說易不信)이오. 내가 설해도 또한 믿지 아니하니,

한 글자의 법문이라고 만들어 지었다.

중생불신 시심시불(衆生不信 是心是佛)이라,

중생이 불신해서 이 마음이 부처라 하는 걸 믿지 아니하네.

부유다동방편(佛有多動方便), 부처님이 중생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우둔하고 딱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움직여서 내놓는구나.

 

지중생견자본성(指衆生見自本性), 중생이 그 스스로 본성을 본다면,

청청취죽(靑靑翠竹) 진시진여(盡是眞如),

푸르고 푸른 대나무가 다 진여(眞如),

수시친견진여(須是親見眞如)니라. 모름지기 이 진여를 참으로 가까이 친하게 봄이라.

울울황화(鬱鬱黃華)가 꽉 차 있는, 산천초목과 들판에 누른 벼와 보리도,

푸른 잔디도, 모든 것이 무비반야(無比般若 )..

반야(般若) 아닌 것이 없도다.

 

수시친견반야(須是親見般若), 친히 이 반야를 봤느냐?

 

협산스님이 이르시되,

도무호부재(道無乎不在). 도는 없어서 있는 것이 아니야.

또한 이르되,

견색변견심(見色便見心), 색을 보고 문득 마음을 볼 줄 알아야 되느니라.

중생지견색불견심((衆生只見色不見心),

모든 우치한 중생들은 모든 형색을 보고 그대로 형색이라고 볼 뿐이지,

거기에서 마음은 참으로 볼 줄 모르는구나.

모든 밖에 있는 드러나는 형색을 볼 때에 바로 거기에서 마음을 볼 줄만 안다면, 무엇 때문에 답답하게 반야경이니, 주해니, 이런 어렵게 구구하게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중생이 다만 색()을 보고 그 마음을 보지 못하니,

약능궁구(若能窮究), 보보행행(步步行行), 만약 능히 연구해서 걸음걸음

오나가나 염자재자(念玆在玆),

죽비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말이에요. 마음이...

또 나는 장에 간다 하면 거기 있단 말이지.

온다 간다 일한다 밥 먹는다 연구한다 배운다

일체처(一切處)일체시(一切時), 그때 그때마다 항상 마음을 쓰고 나타난다 이 말이지.

 

축착개착(築着磕着)이라

모든 곳에서 착착 다 맞아 들어가.

맷돌이 턱 맞아서 뾰족한 거와 구멍이 딱 맞아 돌아가듯이 딱맞아 들어간다 소리야...

, 계합(契合)이 된다 소리야...

척척척척 모든 곳에 계합이 안 되는 것 없어요.

사실이 그렇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 어리석은 중생들은 어디에 막혀있는지 꽉 막혀가지고 도무지 통하지를 못해. 그래 답답한 일 아니야...

 

홀연친견(忽然親見) 명왈견성(名曰見性)이라.

거기서 홀연히 바로 친히 본다면, 이것을 말해서 견성(見性)이라 이래놨어. 견성(見性)이라..

 

차성불가이지지(此性不可以智知)이고, 이 성품은 일반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고,

불가이식식(不可以識識)이라. 지식(식심)으로도 알지 못해.

수시좌고우혜(須是左顧右盻). 모름지기 좌우를 돌아보고,

회두전뇌(回頭轉腦) 처처봉거(處處逢渠).

그 머리를 돌이키고 뇌를 굴리는 곳 처처에서 다 만나고 건너간다.

 

거금정시아(渠今定是我), 이제 정히 이것이 나인가...

아금불시거(我今不是渠), 나는 이제 건너는 것이 아니다.

 

약능여시회(若能如是會)에는,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방득계여여(方得契如如).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契合)함을 얻은 것이다.

 

차성무형무상(此性無形無像)이라.

이 성품(性品)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도 없고 또한 형상도 없다.

 

어불견지상친견(於不見之上親見)이고,

저 보지 못하는 위에서 친히 볼 뿐이고,

어친견지상불견(於親見之上不見)이니,

보려고 하는 그 위에서는 보지 못하니.. 못 본다 이말이야.

이종종상(離種種相), 가지가지 모양을 다 여의고,

모든 모양을 볼 때 그 모양에만 집착해서 따라가면 본성(本性)을 잊어버린다 이 말이야.

견자본성(見自本性) 시명묘도(是名妙道).

자기의 본성을 보게 되면, 이것이 이름하야 묘도(妙道)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이지.

 

그래서 일체 중생은 모든 형색을 볼 때, 단지 그저 형색만을 보고,

거기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일으킨단 말이지요.

좋다 나쁘다.. 모양에 따라가서 계속 사량분별, 망상심을 일으켜 나가는 것,

그것을 한로축괴(韓盧逐塊)라고 합니다.

개는 돌을 던지면 흙덩이만 보고 따라갈 뿐이다 이거지요.

그러나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 사자는 돌을 던지면 돌덩이를 따라가지 않아.. 돌이 온 그 낙처(落處)를 알아...

그 돌이 어느 곳에서 왔느냐 하는 것을 알고, 던진 그 사람을 바로 보고 가서 물어버려...

일체 중생은 모양을 볼 때, 단지 모양이 진실로 참 모양인 줄로만 착각을 해서 알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일체 모든 모양을 싹 없애 치우고, 가루처럼 부숴 치우고, 허공처럼 다 치우고 난 뒤에, 이것이 공한 것이고, 이것이 참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

그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한 건 아니라..

그걸 또 잘못 알아들으면 안 돼요.

 

일체 천태만상의 모양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터럭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존재해 있는 그대로를 보고 그 속에서 바로 진리를 바로 볼 뿐이라.

진리를.. 성품을..

()의 도리를 바로 볼 뿐이에요.

그걸 부숴 치우고, 대상을 없애 치우고 하는 게 아니고, 그대로 존재해 있는 걸 보는 속에서 진리를 볼 뿐이라.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 이름을 묘도(妙道)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서 반야경 대전조사 주해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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