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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학산 대원 스님 소참법문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7-21 조회수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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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화선(看話禪)에서 선(禪)은 말하기 이전 소식인데 왜 말(話)을 하는가?


 역대 조사스님들은 말을 할 수 없는데서 말을 했습니다. 그게 특출합니다.


 말을 안하는 걸로 다 된 게 아니고, 간화선은 거기서 한발짝을 나아가서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최고 극치의 선을 일구로 말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둘이 아닌 법문(불이법문)입니까?” 

하는 물음에 문수보살은

  “일체법은 말할 수도 없고 보일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어서 모든 문답을 떠난 것이 불이법문입니다” (於一切法 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라고 하였고, 유마거사는 그 물음에 묵연히 침묵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면 벌써 어긋나니까 유마거사처럼 묵연한 것이 최고구나 하고 물으면 전부 묵연히 있는 걸 한다면 된 건가요? 그게 왜 안되는 것입니까?


 유마거사나 문수보살은 체득해서 깨달은 분들이니 이랬든 저랬든 관계가 없지만, 중생들은 깨닫지 않고서 지식으로 들어서 모방한다면 그건 큰 업을 짓는 것입니다.


 불이법을 묻는데 대해서 문수보살은 “말로 할 수 없다”라고 말을 했고 그 장면에서 유마거사는 묵연히 있는 걸로 응대를 했지만,

 만약 육조, 마조, 조주 스님 같은 조사스님들이라면 거기서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말로 할 수 없다” 하면 이미 말을 한거니까 방망이를 맞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 말 안하고 묵묵히 있으면

 “말도 한마디 못하고 벙어리냐? 너는 앞으로 벙어리 노릇하고 살아라!” 

 하고 또 한 방망이 맞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방망이를 맞는데 어떻해 해야 합니까? 


 과거의 조사들은 대답을 했습니다. 신출귀몰하게 어느 누구도 입을 댈 수 없는 말을 척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게 불법의 대의(佛法大意)입니까?”

 “면남간북두(남쪽을 향해서 북두칠성을 보느니라).” 


 이렇게 말로 할 수 없다고 안하는 게 아니라 답을 합니다.

 황벽은 임제가 불법대의를 묻자 두드려 팼습니다.

 다 알아듣게 해 준 건데 여러분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간화선(看話禪)은 분명히 대답을 하니, 그게 간화(看話)이고, 선(禪)이 붙는 것은 거기 깊은 진리의 의지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대답을 해 줬는데 바로 못 보니까 그 의지가 뭔지 참구하는 선(禪)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특출하고 굉장한 묘(妙)가 있습니다.

 아마 이 간화선이 없었더라면 거의가 말을 하면 그르치기 때문에 묵연히 있는다는 여기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근래에도 어느 큰스님을 찾아가니까 응대를 안하고 가만히 눈 감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같습니다” 

 이래도 일체 말을 안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는 분들은 멋지게 응대를 잘합니다. 모르면 서로 어긋나서 소용이 없습니다.


 요새 관법을 하면 깨닫는 줄 아는데 그걸 해서 깨닫지 못합니다.

 관법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이 되지만, 그것도 계속 안하면 또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대상을 놓고 행동으로 지어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有爲法) 


 본래 지을 것도 없고 할 것도 없는 걸 바로 보고 깨달으면 완벽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우두법융 선사도 선정락을 즐기다가 사조도신 선사를 만나 경책받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밖에 다른 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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